나의 모터싸이클 연대기(응답하라 1993~1999)
고3. 1993년의 여름
나는 아파트 자전거 주차공간의 구석에 커버로 덮혀진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승용차의 재림으로 더 이상 오토바이에 오르지 않으시고 방치해 둔 그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전의 일 때문이었다.
고교 시절 기숙사 생활을 하던 중 같은 부서의 친구가 오토바이 하나를 주워 놨다며 타보고 싶으면 본인한테 얘기하란다.
당시 광주직할시에서는 종종 수입 바이크들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 배기음을 들으며 동경의 대상이 되었기에 친구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 졌다.
머지않아 친구를 따라 학교 앞 주공아파트 단지의 구석에 세워져 있는 빨간 바이크와 마주하게 되었고 그 이름은 88 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정식 이름은 대림의 DH88.
자전거로 면단위 시골에서 싸돌아 다녔기에 두바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조작방법을 간단하게 듣고 스로틀을 열어보니 상당히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생각해 봐도 부드러웠다는 느낌, 그리고 핸들 폭이 넓지 않았다는 느낌..
기어를 한단 올려 달리니 몸이 뒤로 젖혀지는 상당한 가속감을 맛볼 수 있었다. 사실 더 어렸을 때 아버지의 뒷자리에서 허리 벨트를 양손으로 잡고 달린 기억은 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임은 확실 했다.
그렇게 오토바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번호판도 달려있지 않은 빨간 88과는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집에도 오토바이가 있는데...
왼손의 클러치레버를 잡고 변속 후에 액셀을 감으면서 클러치를 놓는다. 친구에게 매뉴얼 조작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본다.
여름방학이 되었고 순천의 집에 오자마자 오토바이 키를 찾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물론 아버지 몰래.
커버를 벗기니 짙은 갈색으로 도장된 차체가 눈에 들어온다. 넓은 핸들에 차체 무게도 상당해 조심조심 힘을 써가며 넓은 장소로 끌고 나와 여기 저기 살펴보기를 시작. 네모난 헤드라이트에 계기반의 형상도 네모지고 연료탱크위의 뚜껑도 네모지다. 바로 대림의 GL125 였다. 스포크휠이 달린걸 보면 86~87년 정도의 모델일 것으로 유추해 본다.
GL125와 함께 찍은 사진은 없어 다음카페 '두바퀴마을' 에서 내려받음.
지금 자료를 찾아보니 1981년 11월 ~ 1987년 까지 생산됐으며 CG125의 대체 기종으로, 엔진은 OHC 방식에 10,000rpm에서 16마력의 힘을 냈다.
킥스타터 방식으로 액셀을 감으며 힘차게 밟아 내리기를 서너번 하니 푸륵푸륵 시동이 걸린다. 88보다는 다소 거칠고 무게감 있는 진동이었다.
운동화에 츄리닝, 반팔... 그게 전부였다. 면허는 물론이고 교통법규도 전무한 상황에서 안전장비 하나 없이 도로로 나왔다. 아파트 단지 주위를 달려보니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고, 맞바람 때문에 올백으로 변한 머리칼에 눈은 찡그리며 달렸지만 처음 느끼는 속도감과 조작감에 무척이나 흥분되었다.
조금 더 멀리 가보자는 마음에 뉴코아백화점(지금의 NC백화점)을 지나 고개를 넘어 공단 방면으로 향하지만 기쁨도 잠시 교통경찰관의 단속에 걸리고 만다. 지금도 그 자리에 과속장비가 설치되어있는걸 보면 당시에도 과속의 주된 장소였나 보다.
면허도 없는 나를 보고는 “하이바 쓰고 다녀라” 하며 선처를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스무살이 되던 1994년 초에 자동차 면허를 취득했지만 GL125를 자주 찾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대림의 VF와 효성의 엑시브가 인기를 끌고 있었고 노후화된 GL125를 끌고 다니기에는 창피함도 없지 않아서 탈 일이 만지 않았기에 라이딩 테크닉도 부족했을 것이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첫 번째 슬립을 경험하게 된다.
폭 좁은 커브 시멘트 길에서 원심력을 이기지 못한 한번의 슬립으로 무릎의 상처가 오래 갔다. 딱지가 생겨 나을 만하면 축구하다 넘어져 하필 거기가 다시 쓸리는 바람에.
아버지의 오토바이크와는 대학 2년 때 이별을 했다. 좁은 골목길 교차로에서 먼저 진입한 무쏘의 옆구리를 내가 받아버리는 사고로 앞휀더와 라이트 정도가 부서진 걸로 기억하는데 수리하지 않고 방치하다 아버지께서 폐지하셨다. 무쏘의 수리비용도 아버지가 내주셨고 몸 안다쳤으니 다행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값진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아버지의 오토바이와 이별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생수 배달이었다. 오후에는 커피숍을 돌며 냉온수기에 말통을 넣고, 저녁시간에는 술집에 넣는 일이었다. 한달에 30만원 받았는데 그로 인해 흰색 VF125를 중고로 영입하게 된다.
갈매기 핸들의 VF125
친구들과 전남 투어중 해남에서
군 휴가중 부산 투어때
갈매기 핸들로 편한 포지션에 카울로 인한 방풍성까지 뛰어난 올라운드 플레이어. VF와 VC125(어드밴스)를 타는 친구들과 함께 순천-강진-해남(1박)-목포-광주로 이어지는 전남 투어를 하면서 처음으로 그룹 주행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2종 소형은 악명 높은 나주의 시험장에서 한번에 합격했었다. 처음으로 250cc 바이크를 시험장에서 타보았는데 기종은 효성의 GSX 250E 로 기억한다. 면허를 소지하게 되니 대형바이크를 타고픈 충동은 더 해만가고...
96년 1월. 군 입대를 하면서도 바이크는 정리 하지 않았다. 지하주차장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장기간 보관이 편했고, 아버지께서 일주일에 한번씩 시동을 걸어주셔서 컨디션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상병 휴가를 나와서는 부산에 1박2일 일정으로 장거리 투어를 다녀오기도 하면서 바이크가 주는 행복감을 만끽했다. 전역 후에는 반드시 대형바이크를 타 보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곤 했다.
98년 3월. 전역 후에도 VF와 함께 했지만 이미 출력의 목마름은 극에 달했다. 월간 잡지로 대리만족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 아르바이트는 월급이 적었고 이렇다 할 인맥도 없어 생각해 낸 것이 택시였다. 광주의 운수연수원에서 3일간의 교육을 받고 어렵지 않게 택시회사에 취업 할 수 있었다. 오전 7시30분부터 밤 10시30분까지 이틀 일하고 하루를 쉬는 주간 근무로 6개월 정도 했고 5백여 만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드디어 다음해인 1999년 봄. 단골 센터에 의뢰해 97년식 CBR400RR을 광주에서 내리게 된다. VF는 센터에서 매입하고 당시 구입가는 출장비를 포함해 650만원. 동그란 듀얼 헤드라이트, 좌우대칭을 따르지 않는 쓰리써클 계기판, 견고해 보이는 알루미늄 프레임과 스윙암, 굵어보이는 리어 모노쇽, 떡 벌어진 연료탱크.. 등
내 눈앞의 하얀색 컬러의 CBR400RR은 환상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어 놨을까? 잡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외관을 자랑했다. 정말 안 먹어도 배부르고 바라만 봐도 즐거움이 가득했으니까.
처음 센터에서 출고해 4차선의 강변로를 타 보는데 출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스로틀을 감을수록 바이크는 앞으로 나가는데 내 몸이 자꾸만 바이크에서 떨어져 나갈려는 느낌. 바로 신세계를 맛본 것이다. 소음기는 요시무라 볼트온으로 장착되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순정인 줄 알고 탔다. 영혼을 울리는 사운드.. 오케스트라의 웅장함도 이보다는 못하리라. 사진과 함께 간단한 시승기를 잡지사로 보냈고 잡지 끝부분에 게재되기도 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연비였다. 뭔 기름이 이리 빨리 소진되는지 처음에는 황당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국산 125cc만 타 봤으니 체감은 더욱 컸겠지.
연비 뿐 만 아니라 모든 소모품도 몇 배 비쌌고, 보험은 당연히 책임만 들었으므로...
한 가지 확실한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절대로 사고내면 안 되겠구나’
쌍둥이 CBR400RR
익산 우중 투어
CBR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쌍둥이 바이크를 만나게 된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살 아래의 동생이 같은 색상의 CBR을 구매한 것이다. 익산으로 둘만의 투어를 갔는데 전주 인근에서 폭우를 만나 빗속을 주행한 기억이 남는다. 다른 추억으로는 서울에 볼일이 있어 그 해 여름, 집에다는 거짓을 고하고 순천에서 건국대입구역까지 거의 쉬지 않고 5시간 정도에 주파했는데 그날 밤 양팔과 목이 쑤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틀 뒤 복귀 할때는 남양주 부근에서 가득 주유를 하고 내려오다 남원의 외곽에서 과속단속 경찰의 정차 신호를 무시하고 곧장 도망쳤는데 1Km 정도 주행 후 엥꼬를 맞이하게 된다. 만약 추격해 왔더라면 꼴좋게 스티커를 발부 받았을 텐데... 갓길에 세워두고 멀리 보이는 다른 도로상의 주유소에서 페트병을 이용해 연료를 넣었던 기억들...
순천 상사호
가운데 하얀 수트를 입은 분이 레이서로 활동한 분이다.
동남아에서 레이서로 활동했던 분이 순천의 모 센터에 있었는데 그 분을 따라서 투어를 몇 번 다녔다. 당시에 야마하 R1과 미쓰비씨의 이클립스를 소유한 걸로 기억하는데, 바이크 계에서는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한번은 그 분과 단둘이 순천 상사호의 와인딩 코스를 달렸는데 배기량을 떠나 미천한 실력으로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스킬이나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한 속도로 코너를 돌아 나간다는 것은 사고의 지름길이다.
애마 보내기 몇일 전
아무튼 사고 없이 CBR400RR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그해 10월 떠나보내게 되니, 360만원에 실력자의 센터에 넘기며 이별을 맞이했다. 지금처럼 개인거래가 활발했다면 택도 없는 금액이다.
팔게 된 이유는 비록 입문 정도였지만 대형바이크의 세계를 경험해보고 나니 지속적으로 타야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고, 마이카의 새로운 즐거움을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가끔 타고 싶을 때는 동생의 CBR을 빌려 타기도 했고, 친구의 CBR1000F를 빌려 타며 아쉬움을 채웠다. 몇 년 후 친구의 ZX-7R, 지인의 발칸 500에 잠깐씩 올라봤지만 예전의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되돌아 보면 오토바이를 접하게 되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친구로 부터의 88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의 오토바이. 아버지...
짧은 글을 쓰면서 옛 사진을 스캔하기 위해 오랜만에 앨범을 찾으니 마음이 울컥거린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사진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금 바이크에 오를 수 있기 까지는 아버지의 영향력이 가장 지대했기에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우연희 흰색 CBR400RR을 마주칠 때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지금 140마력을 상회하는 바이크를 타지만 과거 53마력의 출력에 대한 기억을 쉽게 압도하지 못하는 만큼 소싯적의 기억은 강력하고 소중한 것이다.
젊다고 생각하지만 적은 나이는 아니다. 과거를 추억하고 싶은 것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잊어버린 줄 알았던 모터싸이클의 재미를 14년이 지난 2013년에 재입문하여 즐기고 있지만 중간의 공백기가 길어 더욱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불가능한 꿈이지만 과거 함께 달렸던 친구들과 함께 모터싸이클을 타고 장거리 박투어를 가고 싶다.
마지막 뽀너스.. 9살때의 사진인데 사진속 아버지의 바이크는 대림 CL90 이군요.